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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를기억해'에 해당하는 글들

  1. 2009.07.30  강경, 근대사 여행 (1)
  2. 2009.05.11  Hong kong, May, 2009. Sheung wan, 웨스턴 마켓
  3. 2009.03.26  군산근대건물 탐방, 임피역 (4)
  4. 2009.03.26  군산근대건물 탐방, 발산리 금고
  5. 2009.03.26  군산근대건물 탐방, 발산리 석등 & 5층 석탑
  6. 2009.03.25  군산근대건물 탐방, 이영춘 가옥
  7. 2009.03.24  군산근대건물 탐방, 동국사
  8. 2009.03.24  군산근대건물 탐방, 월명동 히로쓰 가옥 (4)
  9. 2009.03.24  군산근대건물 탐방, 월명동 적산가옥
  10. 2009.03.24  군산근대건물 탐방, 군산 내항 부잔교 뜬다리 (2)
  11. 2009.03.23  군산근대건물 탐방, 舊 군사세관 본관
  12. 2009.03.23  군산근대건물 탐방, 舊 조선은행 군산지점 (1)
  13. 2009.03.23  2009년 봄, 군산
  14. 2009.03.16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0권 - 창씨개명에서 8.15까지
  15. 2009.03.13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9권 - 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
  16. 2009.03.11  2009년 3월, 군산근대건물 탐방
  17. 2009.03.05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8권 - 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
  18. 2009.03.04  2009년 3월, 서울근대건물 탐방 (2)
  19. 2009.02.22  북경 근대사 거리, 동자우민시얀(dongjiaominxiang)
  20. 2009.02.01  인천근대건물 탐방 강화편, 온수리 성공회성당
  21. 2009.02.01  인천근대건물 탐방 강화편, 성공회 강화성당
  22. 2009.01.28  인천근대건물 탐방, 제1은행, 18은행, 58은행. (2)
  23. 2009.01.28  인천근대건물 탐방, 인천부청사 (2)
  24. 2009.01.28  인천근대건물 탐방, 홍예문
  25. 2009.01.28  인천근대건물 탐방, 답동성당 & 인천내동성공회성당
  26. 2009.01.23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7권 -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27. 2009.01.14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6권 -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28. 2009.01.07  2009년 1월, 인천근대건물 탐방
  29. 2008.12.31  전우용, 서울은 깊다.
  30. 2008.10.09  부산, 송정역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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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여행을 다니면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강경이다. 벌썬 한달이 지났지만, 초입부터 느껴지던 그 모습들은 아직 생생하다. 서울과 멀지 않은 거리어서, 하루 코스로 간단히 다녀올 수 있었다.  
마을의 시간은 겹겹이 쌓여 멈추어 있었다. 낮은 건물 들 사이로, 좁은 골목 사이로, 낮게 드리운 햇살만큼 쓸쓸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했다. 일본식 한자어가 흐릿하게 보이는 건물들은 아직도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고, 개축을 해서 보기 흉한 곳도 많이 있었다. 하나씩 수리를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지금 모습이 더 시간을 담고 있는 것 같아 나쁘진 않았다. 화려했던 옛모습때문에 지금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시간과 함께 멈춰버린 빛바랜 기억 때문인지, 그 어느 곳보다 애착이 갔다.


사진은 순서대로,
골목 입구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
강경상고 교장사택
구 남일당 한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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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 근대사 여행 :: 2009.07.30 13:05

홍콩의 오래된 길을 볼 수 있는 곳, 셩완. 격한 트램의 곡선 철로를 앞에 두고 오랜 세월과 함께 한 웨스턴 마켓이 있다. 원래는 식료품을 파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작은 가게들이 안에 있다. 홍콩의 쇼핑센터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돈을 넣고 잴 수 있는 오래된 체중계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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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옥한 군산의 논들을 따라 임피역을 찾아 갔다. 수 많은 곡식들이 모여서 나가고, 또 가고 했을 그 곳을 향해. 기차가 다니지 않은 역사를 초라했다. 창문도 문도 모두 닫혀 있었고 이 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간단히 소개한 말들이 붕붕 부유하는 느낌이다. 옛시간을 뒤안길로 하고 역사는 흘러간다. 칠십여년을 지나 더 이상 사람도 기차도 찾지 않는 곳이 된 이 곳은 그래서 더욱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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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일제시대 지어진 농촌의 소규모 간이역사의 전형.
1936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

* 위치
군산시 임피면 술산리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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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산리 초등학교 뒤뜰에 위치한 금고는 흉물스럽지만, 견고하게 아직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여러가지 유물을 모아두고 즐거워했을 일본인을 생각하니 좀 쓸쓸해지는 느낌. 견고한 문으로 장식한 겹겹의 창살 아래 이젠 나뭇잎만 수북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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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일제시대 군산지역 대표적 농장주였던 시마따니 야스야에 의해 1930년대 지어진 3층 콘크리트 건물


* 위치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발산리 초등학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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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에 유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조용한 농촌 마을이다. 유물들은 발산초등학교 안에 자리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안에 있는 유물들이 잘 보존되기 쉽지 않았겠지만, 나름대로 보존하려는 노력은 엿보였다. 여기저기 모아둔 유물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것 처럼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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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완주군 고산면 삼거리 봉림사지에서 일제시대 이곳 도곡농장 정원으로 옮겼던 것.
발산리초등학교는 1903년 12월 야마구찌현(山口) 구카군 출신의 시마다니 야소야 라는 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마다니 농장이 있던 곳.
개인 소장용으로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에서 옮겨진 석조 유물들이 모여 있음.

* 위치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발산리 초등학교 내 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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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길을 한참 따라 들어가야 했다. 이런 곳에 뭐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논길을 따라 들어간 길 끝에 군산 간호 대학이 있었고, 그 안에 위치하고 있다. 요즘의 펜션같은 분위기를 하고 있는 집은 근대 건물이라고 하기엔 좀 신선했다. 불조심이라는 일본어를 보고선, 그때 그시절 집임을 확인. 집 안에 들어갈 수 없게 잠겨 있었고, 주변만 슬쩍 둘러보고 돌아왔다. 쌀쌀해진 날씨와 너무 잘어울렸던 집 풍경이 약간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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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일제 강점기 전국최대의 농장주 구마모토에 의해 1920년대 건축.
한식, 양식, 일식 복합적인 모습.
외부는 유럽식, 평면구조는 일식의 중복도형, 한식의 온돌방 결합.
건축비는 조선총독부 관저와 비슷하게 소요됨.
이영춘 박사가 이용한 의료사적 가치를 지는 주택.

* 위치
군산시 개정동 군산 간호대학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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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 입구부터 묘한 느낌이 들게 하더니 들어서고 나선 한참을 서서 봐야했다. 한국의 절과는 다른 느낌의 묘한 기분이 배경으로 하는 대나무 사이의 바람처럼 신선했다. 개칠을 해서 옛모습을 감추고 있지만 이국적인 느낌은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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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한일합병 1년전 1909년 일본 승려 우찌다 스님이 일종토에서 금강선사 이름으로 포교소를 개창,
1913년 현 위치로 옮겨 대웅전과 요사를 신축한 절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 정방형 단층팔자지붕 홀처마 형식의 에도시대 건축양식
사용된 목재는 모두 일본산 쓰기목


* 위치

군산시 금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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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이 즐비한 월명동을 돌아다니다가, 영화에서 많이 마주쳤던 히로쓰 가옥을 찾아 나섰다. 빛이 발했지만 하늘색 대문이 눈에 들어왔고 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때마침 내리던 비 덕분에 처마 밑을 잠시  기웃거리다, 우편 함 사이로 내부를 들여다 보았다. 오래된 나무가 견고한 세월을 지켜준 듯 단단한 집은 꽤 낭만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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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일제 강점기 군산에서 포목상을 하던 일본인 히로쓰게이사브로가 건축한 전형적인 일식 가옥
히로쓰는  대 지주가 아닌 상업으로 부자가 되어 임피 부근에 농장을 운영하며 부(府) 협의회 의원까지 지낸 인물
전형적인 사무라이 계급의 고급주택인 야지키 형식의 대규모 목조주택

* 위치
군산시 월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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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내항 바로 건너편 블럭에 적산가옥들이 아직 남아 있는 곳이 많았다. 외형이 완전히 변하거나, 조금 수리한 집들, 무엇가 일본스럽게 꾸민 집들 여러가지 형태의 집들이 세월과 시대를 보여주는 느낌이다. 삶의 곳곳이 남아 있어서 쉽게 사진기를 들기 애매했지만, 기억하고 싶은 곳곳의 사진을 세부적으로 담아내진 못했지만 남겨진 몇가지 컷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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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항에 여러개의 부잔교가 있는데, 일제시대부터 남아 있는 것은 하나 정도인 것 같다. 밀물이 들어오면 다리가 올라가고 썰물이 되면 다리가 내려 앉아 뜬다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정된 다리가 아니어서 생각보다 덜컹거림도 있어서 걷기는 살짝 불안했고, 낡고 오래된 목재들이 세월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애뜻했다. 내항의 쓸쓸한 풍경이 그림이 되어 더 애잔함이 느껴지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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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
군산 내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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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근대 건물 중 꽤 보존이 잘된 편이었다. 주말이어서 문은 열지 않았고, 두리번 두리번 건물 외관만 보고 왔다. 단단한 돌을 쌓아 올린 모양이 생각보다 견고했다. 오랜 시간 동안 농민의 피땀을 빼앗아 갔던 곳이라 생각하니 더 두터운 벽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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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1908년 준공, 독일인이 설계했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을 수입하여 지은 유럽식 양식.
한국은행 본점과 같은 양식.
내부는 목조, 지붕은 슬레이트와 동판으로 만들어졌다.

* 위치
군산항 앞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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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항을 향해서 달리고 있었다. 근대 유적에 대해 나와 있을 법한 관광지도를 구하지 못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목적지는 군산항이었다. 넓은 사차선 길 가에 우드커니 낡은 건물이 눈에 보였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은 여러번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고, 세월만큼 무겁게 내려 앉은 외형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보수를 준비 중인 듯 하지만 아직 조금은 더 기다려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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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1923년에 지어진 벽돌조 2층 건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에 인질로 잡혀왔던 독일인들에 의하여 설계, 중국인에 의하여 시공
1899년 개항되어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의 대일본수출항으로 유명했던 군산지역에서 일제 식민지 지배를 상징하는 대표적 건물
채만식의 ‘탁류’에도 등장


* 위치
군산항 앞 블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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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 다녀왔다. 밤에 두번 들렸고, 밝은 날에 들린 건 이번이 처음이 었다. 매번 지나던 길이 었는데, 이번은 군산이 목적이었다. 주로 돌아봤던 월명동은 생각보다 우울하고, 어두웠다. 맑지 못한 날씨 덕에 극명한 삶의 구석구석을 헤집어서 보고 온 느낌이다. 여기저기 일본식 한자어의 길 이름과 지명이 눈에 밟힌다. 일본인이 심고 갔을 법한 벗나무도 아직은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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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봄, 군산 :: 2009.03.23 11:01


전쟁의 미친 일본인들은 더욱 극단으로 치닫는다. 근검하고, 성실한 일본인의 얼굴 뒤에는 잔인하고, 맹목적인 그림자가 숨어 있는 것 같다. 전쟁의 주범에서 평화의 얼굴로 변신시킨 천황의 존재가 이를 증명해주고, 극단적인 성격의 이중주가 줄거리인 사이코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그들에 의해 보내진 40년대는 그만큼 비극이 아니었을까 싶다. 뼈속까지 일본인이 되길 강요하고, 천황에게 만세를 외치며 전쟁으로 나가주길 원하는, 아이의 건강과 다산을 강조했던 그들의 잔인함이 우울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더 화가 났던 건 분열과 분파의 틈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린 지도자들의 모습이다. 방향도 없고 의지도 없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역사가 되서야 깨닳는 어리석은 모습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지만.

일본의 황제가 항복을 하는 8월 15일이 아닌, 미국에게 항복을 싸인했던 9월 2일을 기억하며 우울한 근대사 공부를 마감한다. 더 많은 책을 봐야 하고, 공부를 해야겠지만, 우울한 마음때문인지 마음만 더 무거워질 뿐이다.




한국 근대사 산책 10권 - 창씨개명에서 8.15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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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8-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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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병의 기억이 그닥 없는 세대는 일본이 주는 문화적은 혜택을 가득 받고 자란다. 이등국민이라는 치욕은 있었지만 일등 국민이 되기 위해, 근대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모던걸, 모던보이로 치장을 하고 나선다. 근대와 전통이 혼동된 시대의 아이러니를 넘어 짧은 단발과 아직 긴 댕기를 두른 사람들은 뿌연 다방 안의 연기처럼, 또는 쓰디쓴 커피 맛에 중독된 문화적인 충돌 안에서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을 것 같던 기나긴 어둠의 터널처럼 답답한 삶을 연명한다.


자유연애,
나혜석이 네 아이아의 엄마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정조가 취미'이라고 당당히 말했던 그녀의 용기가 이 시대에도 충격이고, 무한한 자유를 꿈꾸던 그녀도 물질적인 자유 앞에서는 여지 없이 무너지는 것도 안타까웠다.

다방,
정치적인 자유가 없는 그들에게 다방은 해방구였을 것이다. 사약같은 커피를 마시며, 문명이 주는 편안함을 즐기며, 식민지에 수긍해 가는 지식인들의 답답함이 그대로 묻어 난다.



한국 근대사 산책 9권 - 연애열풍에서 입시지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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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8-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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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목적지는 군산항, 그 근처의 군산세관 건물
그리고, "군산 근대사마을이야기지도"를 천원주고 사기!

주요 스팟들
옛 조선은행 (1923년)
나가사키 18은행 군산시점 건물 (1907년)
군산세관 건물 (1908년)
히로쓰가옥

- 월명동, 신흥동 일대 일본식 건물들
- 군산에서 큰 포목점을 하며 돈을 벌었던 히로쓰가 지은 일본 무사들의 고급주택인 야시키 형식의 대형 목조주택으로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야쿠자 두목 하야시의 집으로 등장
동국사
-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일본식 사찰
- 일본인 승려 우치다가 1913년 일본에서 삼나무 등 재료를 가져다 이곳에 지은 것으로 가파른 지붕에 단층식 팔작지붕, 건물 외벽의 많은 창문 등 대웅전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일본식
- 시인 고은이 머리를 깎고 불교에 입문한 사찰
발산리 석등(보물 234호), 발산리 5층 석탑(276호)
- 개정면 발산리 발산초등학교 뒤뜰에 가면 석등과 석탑
- 일본인 대지주였던 시마타니가 자신의 정원을 장식하기 위해 인근 사찰에서 가져온 것들
- 왕이나 귀족의 능, 절에서 가져온 듯한 문인석·석양·부도 등 30여 점
- 사마타니가 귀중품을 넣어두는 금고로 사용했던 3층 규모의 건물
이영춘 가옥
- 군산간호대학 구내
- 전국 최대 농장주였던 구마모토가 1920년 지은 별장인데, 유럽풍 외관에 일본식 응접실, 한국식 온돌 등을 갖춘 건물
해망굴
- 당시 4대 개항장에 속하는 군산항 축항공사와 관련하여 1926년 군산내항과 시내를 연결하기 위해 반원형 터널(131m) 시설로 군산개항의 대표적 상징물
- 해망동과 신흥동을 연결
구 시마따니 농장 귀중품 창고
- 920년대 건립된 일본인 대지주의 창고 건물로 농장의 각종 서류와 현금, 한국에서 수집한 고 미술품 등을 보관하던 장소이며, 건립배경과 기능이 독특한 근대문화유산으로 당시 일본인 대지주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역사적 현장

부잔교
노성당
채원병 가옥
엄대우 가옥
구)남선전기회사 건물
구)외자청 건물
구)세창병원
이돈희 가옥
월명동 일대 일본식 가옥
옥구읍 일대
당북리 1개소
장미동 일대 미곡창고 건물
뜬다리
군산항
가부끼극장
이성당, 최초의 빵집
군산부윤사관

참고자료
1.송석기, 2004.10, 군산지역 근대건축물의 현황 및 변천에 관한 기초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20권 10호
2.이경찬, 황경택, 홍환성, 2005, 군산 근대 시가지 경관의 형태적 특성과 보존 방향에 관한 연구, 대한국토 도시계획학회 2005 정기학술대회
3.박종현, 권영, 이채성, 2006.7, 일제강점기 신도시 공간구조 분석,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22권 7호

참고기사
타임머신 타고 되돌아가다, 군산으로의 시간여행
혼자 떠난 그녀, 군산의 과거를 찍다 ①
혼자 떠난 그녀, 군산의 과거를 찍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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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에너지를 전쟁으로 몰고 가는 일본의 극단적인 행동들 아래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책을 읽어 내려갈 수록 가슴이 답답했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만주 사태 등 역사 교과서에 만났던 식상한 단어들이 실감나는 현실로 느껴지는 묘한 느낌이었다. 돌아가신 외 할아버지의 친구였던, 손기정 할아버지가 어릴적 내게 보여줬던 금메달의 의미를 나는 얼마나 깊이 새기고 있는 걸까,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어 책을 읽어 내려갔다.

#1. 우리는 정말, 광복을 원했을까.
중국 공산당으로 입단해, 일본의 첩자로 오해 받아 죽었던 김산의 아리랑의 비극은 당파싸움으로 끝이없던 광복을 준비하던 모든이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면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광복을 원하긴 했을까 할 정도로 너무 많은 노선에서 너무 많은 희생과 혼동이 남무한 시대. 지금도 다를바가 없지만, 부끄럽다.

#2. 우리는 고려인을 기억하고 있는가.
만주로 간 이들, 다시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고 있는지. TV에서 가끔 보는 고려인에 대한 애증에 대해서 나 또한 할말 없지만, 가슴 뭉클하게 기억하고 싶은 역사나 기억에 대한 자취만으로는 위로가 되진 않는다.

#3. 이광수가 자살을 택했다면, 우리의 역사가 바뀌었을까.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극단으로 치닿는 현실 앞에서 전향이라는 꼬리표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이광수에게 친일은 목숨보다 더 쉬운 선택일 수 있었겠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 답답함에 대한 위로는 되지 않는 것 같다.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설령 그때 그 순간을 현재가 아닌 미래로 보았다면, 우리 모두의 의식과 역사에 대한 반성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적어도 대한민국의 부조리를 없앨 수 있는 희망의 씨앗이 되었을테니까.



한국 근대사 산책 8권 - 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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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5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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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서울에서 삼십년을 넘게 살면서, 지나가다 본 여러가지의 근대 건물들이 대부분이긴 해도 하나씩 모아서 다시 꼼꼼히 살펴보기로 맘을 먹었다. 자료를 찾는게 정말 하늘의 별따기였고, 문화재청과 서울역사박물관은 정말 화가 날 정도로 자료가 없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만 나열한 식의 짜집기 자료 말고, 실제 근대 역사 건물로 등록된 문서 하나라도 다운 받을 수 있도록 해주면 어떨까. 사학과 출신이 아닌 우리는 그냥 웹에서 자료를 모아 가야 할 곳들을 하나씩 모아봤다. 실제로 근대라기 보다는 비교적 최근 건물들이 많아서 살짝 답답.


서울, 근대건물들


덕수궁의 정관헌(등록문화재 82호)
서울시립미술관(등록문화재 제237호)
서울시의회건물(등록문화재 제11호)
: 서울시 중구 태평로 1가 60-1번지. 덕수궁 옆에 자리 잡은 이곳은 1935년 12월 10일 부민관(府民館)이란 이름의 공연장으로 지어졌다. 일본 동경 히비야(日比谷)에 있는 공회당을 모델로 삼아 세워진 이 건물은 철근콘크리트조(연면적 1714평·7,097.3㎡) 탑식지붕모양이 상징적이다. 대지 1780평·건축면적 584평에 지하 1층·지상 3층짜리다. 2002년 5월 31일 문화재로 등록된 이 건물은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으면서 각종 행사장으로, 또 1954년 6월 국회가 여의도로 옮겨가기 전까진 국회의사당
서울시 광진구 화양동 1번지에 있는 건국대학교박물관(등록문화재 제53호)
:1908년 1월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은 1910년 일제강점까지 서북학회 등 애국계몽운동 전진기지로 쓰이다가 학회의 강제해산 후 오성학교(전신 協成學校) 교사로 사용됐다. 보성법률상업학교(1918~22년), 협성학교로 쓰이던 중 1938년 민중병원으로 전용됐다.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2가 5번지 한국전력사옥(등록문화재 1호)
서울시 중구 을지로 롯데호텔 맞은편의 서울시청 별관(등록문화재 제238호)
서울 성북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혜곡 최순우의 옛집(등록문화재 제268호)
서울 종로구 계동의 서울 북촌문화센터(구 민형기 가옥·등록문화재 제229호)

교육시설로는 성공회대 구두인관(1935년)
서울시립대의 경농관과 자작마루관 박물관(1937년)
경희대 본관(1953년)
동국대 명진관(1954년)
건국대의 옛 도서관과 문리과대학(1958년)
이화여대의 과학관(1948년)과 대강당(1954년)
남산시립도서관(1963년)
서울시 부속 청사로 사용하는 종로구 송월동 옛 국립중앙관상대(1959년)
자유센터(1960년)와 타워호텔(1962년)
유네스코회관(1967년)
공간사옥(1971년)
국립중앙극장(1972년)

한국정교회 대성당(1968년)
절두산순교기념관(1966년)


그리고, 챙겨가야 할 전시
"
대한제국 황실사진전" , 2009년 03월 07일(토) - 06월 06일(토), 한미사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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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찾고 있던 근대사 건물을 북경에 가서도 찾아 헤매이고 다녔다. 베이징동방문화호텔을 근처로 근대시대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일부는 아직도 사용되고, 일부는 관광지로 지정이 되어있는 듯 하다. 거리에는 백년전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길을 걷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했다. 생각보다 많은 나라들의 건물들 사이로 우리나라와는 다른 규모로 그렇게 동양의 근대사를 장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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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리 성공회 성당은 생각보다 강화도의 깊숙히 있었다. 주변의 새로 지은 성당에 가려서 겉에서 볼 때는 아직 있나 싶을 정도다. 입구는 강화성당과 비슷한데, 좀 더 한국스러운 분위기였다. 절의 입구와 살짝 비슷한 느낌이다.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어서 안타까웠지만, 낮은 한옥에 십자가를 올린 것이 색달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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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이어, 강화도에 있는 근대건물들을 찾아 나섰다. 생각보다 좀 더 한국스러운 건물들을 만나서 당황스러웠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이층구조의 한옥으로 지어 더욱 특이했다. 안에는 아직도 예배를 드리는 듯 했다. 창문 안을 들여다 보는데, 묘한 문화적인 융화가 새삼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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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은행, 제18은행, 제1은행, 그리고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우체국




중구청 앞 구역에 근대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부산에서 처럼 근대사 박물관 역활을 하고 있는 18은행을 제일 쉽게 찾을 수 있고, 그 옆에 58은행도 바로 볼 수 있다. 18은행과 58은행이 있는 곳에서 차이나 타운쪽에 제1은행도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일본 조계지에서 부터, 일제 시대까지 수탈을 위한 점령지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물은 귀엽고, 아름다웠다. 북경에서 만났던 여러 근대 건물보다 크기면에서 많은 차이가 났는데 일본의 영향인 것인지, 국력의 차이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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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청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건물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건물은 지금도 현대적이고 유용하다. 중구청을 뒤로 하고 우측이 차이나 타운이고, 주변에 있는 골목에는 일본식 적산 가옥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때 그시절의 거리를 조성하기 위해서, 하나 둘씩 건물의 외형을 손질하고 있었다. 조만간 새로운 거리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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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청 건너편, 일본식 거리로 꾸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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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예문
일제의 조계지 확장을 위해 지어진 홍예문은 아직도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천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찾아봤던 몇몇 지역 중 가야 하나 말아야 하는 곳 중 하나였는데, 막상 가보니 느낌이 살짝 묘했다. 겨울이라 말라 비틀어진 담쟁이를 보는 것도 애틋하고, 아직도 견고하게 버티고 일상 생활 깊숙히 파고 들어 있는 시대의 유물도 아련했다. 차 하나 정도가 지나갈 수 있는 크기에 마주보는 차는 잘도 양보를 하며 다니고 있고, 사람들은 홍예문 위를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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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던 것 보다 근대건물들은 꽤 몰려 있었다. 어렵게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중구청 근처에 근대 건물들을 복원하고 거리를 조성하고 있어서 더욱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우리처럼 근대건물들을 보러 온 가족들을 몇몇 만났고, 숙제를 하는지 뭔가 계속 부산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느긋히 몇몇 스팟들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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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동 성당
장례식 때문에 근처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 이런 성당이 숨겨져 있는지 알지 못했다. 견고하게 지어올린 성당이 꽤 단단하게 화강암 위에 위치해 있었다. 문이 살짝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가 봤는데, 생각보다 근사한 스테인 글라스도 숨겨져 있었다. 천주교 신자라면 이런 곳에서 결혼을 해도 멋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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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내동성공회성당
홍예문 근처, 주택가 사이에 작은 성당이 하나 있었다. 꽤 높은 산 위에 있어서 차로 가기도 쉽지 않았다. 답동성당과는 꽤 다른 느낌으로 더 견고하고 단단해 보였다. 문이 열려 있었다면 들어가 봤을 텐데 문은 닫혀 있었고, 옆면의 십자가 모양의 벽돌 사이로 화려한 스테인 글라스를 잠시 엿보고 왔다. 우리나라에서 영국의 성공회가 어느 정도 교파를 형성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천편 일륜적인 기독교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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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절정으로 향해 달려가는 1920년은 무척 암울하다. 사람들을 강제로 제압하기 위한 온갖 몰염치함은 증거 무실로 힘을 잃어가고, 억울하게 죽은 이들에 대한 기억은 몇몇 이들의 노력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조선인 집단학살은 단순한 잔인성을 넘은 일본의 잔인한 계산 역시 역사의 일부분뿐이라며 외면하기 일수이다. 유태인 학살을 기억하면서, 조선인 학살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건 우리의 수치일 것이다. 책에서 지적하는 모든 기록에 대한 고민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쏟아내는 기록에 의존하는 반쪽 짜리 역사에 가슴이 아프지만, 저자가 모은 수 많은 자료 덕에 어느 정도 균형은 맞춰져 있다.

사회주의와 의열단
사회주의, 공산당을 연상하는 이 용어는 20년대 내내 현실을 대변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어느 쪽으로 향해가든 독립에 기반을 두었겠지만, 모든 역사의 반증처럼 역사의 힘의 무게중심은 그쪽이 아니었던 것 같다.
박열, 김지섭, 장진홍, 조명하의 의거 뒤에 있었던 의열단의 목숨을 건 행동들이 어느 정도의 경각심을 일으켰을지 알지 모르지만, 요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자살테러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가 씁쓸하고 무심하게 사진을 보고 넘어가지만, 목숨을 건 사람들의 행동이 옳다 그르다 판단은 유보해야 하지 않을까.

조선 총독부
"경복궁을 깔고 앉은"조선 총독부 건물을 오랫동안 보고 자라온 나는 이 표현이 아슬아슬했다. 박물관이었던 시절,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경복궁과 함께 일년에 대여섯 번은 방문하던 곳. 그 곳이 헐리는 뉴스를 TV에서 봤을 때처럼, 역사는 그렇게 무심히 흘러가는 것 같다. 르네상스 풍의 웅장했던 건물의 복도, 아름답던 창의 구조도 아직 생생한데 말이다.

문학의 전성시대
진달래꽃, 님의 침묵, 청춘 예찬. 이 시대만큼 화려한 문학은 없었던 것 같다. 아픔이 있었기에 더 아름다울 수 있었을 까. 아직도 몇 구절씩 생각나는 문장들을 역사책에서 보니, 반갑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한국 근대사 산책 7권 -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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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5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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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에 대한 역사적 의식을 강요하고 싶지 않지만, 그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때면 그런 소신에 자신이 없어진다.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동시대적인 숙제들이 무겁기도 하고, 피 속에서 흐르는 유전자적인 강요도 답답하기만 하다. 수 많은 질문이 쏟아지지만, 대답을 할 수 없는 무책임함. 그때 그시절을 돌아보면 누구든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고종의 죽음과 함께 한 3.1운동.
만세를 외치면서, 죽어가는 시체들 위를 걸으면서 무얼 생각하고 있었을까. 무표정한 한국인들의 얼굴 뒤에 숨겨진 유전적인 침묵은 그런식으로 표현되고, 기억되게 한다.

침묵을 위한 침묵.
지식인의 입을 막았다. 소신을 지켜주길 원하는 지금을 사는 사람들의 바램은 어쩜 억지일지도 모른다. 생사가 달린 상황은 지금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지 않을까.

황량한 폐허, 조선.
조선엔 남은 것이 없었다. 이성은 잃었고, 감정도 숨겨야 했고, 이상은 무덤을 만들어야 했다. 지금의 이기주의나 기회주의가 이미 그때부터 강요당했다는 걸을 알면서도, 예외를 계속 만들고 싶다.

정치를 위한 정치.
혼란 속의 임시정부는 틀을 잡지 못한다. 나라를 위해 투쟁하며 목숨을 잃은 사람들 위로, 양반과 체면을 내세우며 유유히 걸어간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건 김구나 이승만이 아니라는 걸, 지금에서야 알았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그걸 반복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 산책 6권 -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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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8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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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 중구

답동성당 : 중구 답동 3번지 (1937년)

1886년 체결된 한불조약 이후 당시 제물포로 불리던 인천에는 1889년 7월 1일 파리외방전교회의 빌렘(한국 이름 홍요셉)신부가 파견되어 제물포교회(현 답동성당)를 창설하고 포교활동을 시작

(구)일본제1은행 인천점 : 중구 중앙동 1가 9-1 (1897년)
일본제1은행 인천이 개항된 1883년에 부산지점 인천출장소를 개설하고 한국에서 생산되는 금괴와 사금을 매입하는 업무를 대행

(구)인천우체국 : 중구 항동 6가 1 (1923년)
인천 일본영사관 우편국은 1888년 서울의 일본공사관에 출장소를 설치하여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우편사무까지 관장. 조선은 자체적인 우편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이 우편국을 이용

(구) 제물포구락부 : 중구 송학동 1가 11번지 (1901년)
인천에 거주하던 각국지계 내 외국인들의 친목을 위한 사교장으로 인천항이 한창 풍요를 누리던 1891년 관동에서 발족되었으며, 현 건물은 1901년에 신축

(구) 일본제58은행 인천지점 : 중구 중앙동 2가 29-1
일본제58은행은 오사카에서 창설되었는데, 은행장이 조선정부의 화폐제도 개혁을 위한 고문으로 초빙되어 온 인연으로 조선에 진출

팔미도등대 : 중구 무의동 산 375 (1903년)
일본의 압력과 강요에 의하여 외국인 기술자의 손으로 세워지기는 하였으나 한국인 인부들이 동원되었고 대한제국 이름으로 세워진 우리나라 첫 번째 등대

홍예문 : 중구 송학동 (1908년)
홍예문(虹霓門)이란 ‘문의 위쪽을 무지개같이 반원형(半圓形)이 되게 만든 문’ 응봉산 자락에 위치한 홍예문은 인천을 상징할 만한 대표적인 석조 축조물의 하나로 인천항과 한국인촌의 경계지역에 일본인들이 자국의 조계를 확장하고 경인철도 축현역(동인천역의 옛 이름)과 만석동 등지로 편하고 빠르게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하여 1905년 착공

(구) 일본제18은행 인천지점 : 중구 중앙동 2가 24-1 (1890년)
일본의 대한침략 거점이 부산에서 인천으로 옮겨짐에 따라 1890년 10월 일본제18은행도 인천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이 지점은 일본제18은행이 해외에 세운 최초의 지점. 일본 규슈 나가사키(長崎)를 거점으로 하던 일본 상인들은 상해에서 수입 한 영국산 면직물을 다시 수입하여 그것을 한국시장에 수출하는 중개무역으로 큰 수익을 내었다. 이들은 사업이 번창하자 대한 수출무역의 중심지였던 인천에 일본제18은행 지점을 설치한 것

(구) 인천내동성공회성당 : 중구 내동 3번지 (1956년)
인천 개항과 함께 개신교, 천주교보다는 늦었지만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도 인천에서 포교 활동을 하였다. 성공회의 전도는 1890년 8월 원래 영국해군 종군신부이던 고요한(Bishop Corfe) 주교와 함께 의사 랜디스(Dr. Eli Barr Landis) 박사가 인천에 상륙하면서부터 비롯

공화춘 : 중구 선린동 38번지 (1948년)
공화춘은 ‘공화국 원년(元年)의 봄(春)’이라는 뜻이다. 공화춘은 1905년에 건립된 2층짜리 건물이며 전체적으로 당시 청국조계지의 건축 특성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 중구 해안동 1가 9번지 (1895년)
인천항에 본점을 둔 해운회사와 일본 해운회사 지점이 여럿 설치되었다. 이들은 회사 소유기선으로 인천항의 물류운송을 독점하였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에는 병력과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선박으로도 사용되었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각종 물류수송과 국내 연안 물류수송을 독점했던 여러 해운회사들은 이후 일본우선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지점을 철수하였다. 일본우선주식회사 본점은 도쿄에 있었고 인천지점은 1883년 4월에 설치되었다.

(구) 인천부 청사 : 중구 관동 중구청 (1933년)
1932년 8월 19일에 착공하여 1933년 6월 25일에 완공되어 인천부청으로 사용되었다. 공사기간 동안 인천부청은 인천공회당으로 이전하여 업무를 계속했다. 이 청사는 광복 이후 경기도 인천시 청사, 인천직할시 청사(1981~1985년), 중구청사(1985년~현재)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 > 남구

대한민국 수준원점 : 남구 용현동 253 인하공업전분대학 내
‘대한민국 수준원점(水準原點)’은 우리나라 국토 높이 측정의 출발점으로 그 가치가 큰 근대문화유산
우리나라는 1913년부터 1916년까지 약 3년간 인천 앞바다의 간만의 차이를 관측해 평균해수면을 결정했다. 수준원점은 평균해수면과의 차이를 측량하여 육지에 설치해 놓은 것으로 그 표고는 26.6871m이며 1963년에 인천 중구 항동1가 2번지에서 현 위치로 이전

인천 > 동구

창영초등학교(구)교사 : 동구 창영동 37-1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의 전신)는 순수 민족자본으로 1907년 4월 3일에 관립 인천일어학교 안에 임시교사를 설치하고, 5월 6일에 학생 3명으로 개교

인천 기독교사회복지관 : 동구 창영동 42-3
19세기 말 미국 감리교회가 파견한 여자 선교사들의 합숙소

영화초등학교 본관동 : 동구 창영동 36 (1911년)
선교의 목적과 신식교육을 위해 설립된 영화학교는 1892년 4월 미국 선교사 조원시에 의해 영화학당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학교

인천 > 강화군

성공회 강화성당 :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22
1890년 성공회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파된 후 1893년 영국인 왕란도 신부가 강화읍 갑곶리에서 회당 겸 사택을 매수하고 이곳에서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 후 왕란도 신부는 본국으로 귀국하고 1896년 조마가 신부가 부임하여 전도하였다. 1897년에는 영화원이라는 보육원을 개설하고 서양 의술로 많은 환자를 치료하였으며 1900년 이곳에 현재의 한식 중층건물을 완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화 온수리 성공회성당 사제관 :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5-7 (1898년)
1898년 마가트롤프 신부 등이 강화에 부임하여 선교와 의료활동을 시작하면서 건축

강화 온수리 성공회 성당 :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5 (1906년)
1906년 영국인 마가 신부가 지은 것으로, ‘성 안드레 성당’

주소 찾아야 하는 것들

강화도 황씨주택(1928년)
황부자집 또는 김참의원 고택으로 불리는 이 집은 1928년에 세워진 중 2층 건물이다. 화강암 기단 위에 사각형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사각형 목제기둥을 세우고 보를 건 민도리집이다. 대청마루와 건넌방 앞 툇마루 외부에는 유리창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린 합각지붕이며, 처마 끝에는 함석 물받이를 설치하고 우수는 봉황모양으로 만든 토출구를 통해 배출되도록 했다. 지붕선은 물받이의 곡선과 어우러져 매우 날렵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부엌을 둘러싼 외벽하부는 적벽돌로 방화장을 만들고 중간에 난간을 둘렀다. 건물의 전체적인 양식은 한옥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난간 하부장식이나 처마를 받치고 있는 작은 기둥형태, 유리문 등에서 당시 고급주택에서 유행하던 장식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이 집은 백범 김구선생이 망명 도중 변성명하고 강화에 머물면서 훈학하였던 제자의 집으로도 유명하다. 1947년 김구선생이 이 집을 방문하였을 당시에 촬영한 사진이 남아있다.

조양방직과 사무소
조양방직은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최초의 인조견회사로 강화지역의 대표적 지주 가운데 하나였던 홍재묵이 강화읍 신문리 588번지에 세운 회사이다. 이 회사는 설립과 동시에 건축을 시작하여 그해 9월 2일에 공장건물이 준공되었고, 조업은 9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직조기 15대를 설치하고 인조견을 생산했지만, 이후 공장증축과 기계증설로 번성기에는 연면적 2,314.1㎡의 공장과 사무실은 물론 노가미식 직조기 30여대를 갖추고 있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인조견은 외국산에 비해 품질이 좋아 국내는 물론 만주와 중국에까지 수출되었고 연간 매출목표액은 50만원에 달했다. 조양방직이 세워진 것은 토지자본의 일부와 고리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러나 1942년 일본 삼정(三井, 미쓰이) 산하에서 일하던 이세현(李世賢, 창씨명 : 高松世賢)에게 조양방직을 20만원에 인도함으로써 자본전환에 실패하고 말았다.

군회조점(郡廻漕店)
인천시가 추진하는 예촌조성공사의 일환으로 건물 리모델링 공사를 하던 중에 한 일본인이 1902년에 세운 건물의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해안동 1가 2-2번지에 위치한 이 건물에 대한 정확한 유래가 알려지지 않아 2000년대 초 이 건물에 입주해 있던 삼우인쇄소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던 차에 ‘明治三十五年十一月十一日郡金三郞’이란 상량문이 나타난 것이다. 상량문에 기록된 코오리킨자부로(郡金三郞)는 무역 및 해운업자로 쓰시마(對馬島) 이즈하라(嚴原)사람이다. 그는 인천 개항초기에 도항하여 무역 및 해운업에 종사했으며 일본우선회사 기선취급점을 겸하기도 했다. 코오리는 당초 1877년 부산으로 건너와 무역과 수화물 도매를 위해 코오리상점을 열었다. 상점이 번성하자 친동생인 이케다스케에게 가게를 물려주고 그는 아직 개항하지 않은 인천으로 진출했다. 
+ 관련 자료 :
1900년대 초의 사무소건축 ‘군회조점(郡廻漕店)’

각국조계지 경계계단과 주변 석축
각국조계지 경계계단 : 인천에 조계지를 설치하면서 조계지의 경계부에는 만국공원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두었으며, 경사지에는 석조 계단을 설치했다. 현재 인천에는 앞에서 설명한 청일 조계지 계단이 널리 알려져 있고 일본조계지와 각국조계지 사이에 설치되었던 계단의 존재는 일반에 잘 알려지 있지 않다. 그러나 청일조계지 계단이 이상하게 변모한 것과 달리 각국조계지 계단은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다.
석축 : 인천에 세워졌던 많은 건축물이 사라졌지만, 그 건물을 세우기 위해 쌓았던 석축은 지금도 많이 남았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홈링거양행 인천지점 석축, 아끼다 주택 석축, 코노 주택 석축, 우리탕 주택 석축, 긴담모퉁이길 석축, 신흥동 일본인 주택지 석축, 해광사 석축, 리키다케주택(시립도서관) 석축, 맥코넬 주택 석축, 인천신사 석축 등이 있다. 이러한 석축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석축방식과 다른 것으로 마름모꼴 형식으로 쌓거나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일자형으로 쌓았다. 

유항렬주택
대지면적 223.47㎡, 건축면적은 115.37㎡인 이 건물은 1937년 우리나라 최초의 도선사 자격증을 취득한 유항렬이 건축한 주택이다. 지상 2층, 지하 1층의 조적조 창호는 벽돌아치를 틀고 현관은 원주를 세우고 베란다를 설치하였다. 빈 집으로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일부 노후된 흔적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양호한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

관련 자료
+ 자료 출처 :
해반문화사랑회
+ 관련 책 : 손장원의 다시 쓰는 인천 근대 건축 / 인천 근대도시 형성과 건축 / 인천아, 너는 엇더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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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백여년의 역사가 있는 서울에서 나는 태어나고 자랐다. 삼십년을 넘게 살면서, 이만큼 역사가 오래된 도시라는 느낌보다는 도시적인 삭막함에 헛헛거리며 살기 바빴지, 회색빛 콘크리트 바닥 저편에 숨어 있는 오래된 옛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사실 전무했다. 한강을 휘감아 도는 도도한 불빛들처럼 그렇게 고요한 숨결이 오래동안 땅속에 있다 이제서야 발견한 느낌이다. 근대사에 관심이 많은 요즘이여서 그런지, 책의 내용은 보슬거리는 보리밥을 먹는 것처럼 구수하기 짝이 없었다. 딱 내가 좋아는 문체로, 오래된 이야기를 두런두런 들려주는 느낌이었다. 이런 역사 학자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는 것도 참 부끄럽다.

공간이 주는 소속감과 함께 같은 시공간에 있다는 동질감은 묘한 군중심리를 일으키는 것 같다. 내가 숨쉬고 있는 서울이라는 공간의 백여년의 역사를 돌아보고 잠시 옛사람들을 만나고 온 것 같다. 황제의 권위를 놓고 싶어하지 않은 고종이 근대적 문명과 충돌하면서 교묘하게 심어둔 이질적인 잔재들을 이제서야 알 수 있었고, 중국이라는 문명이 조선, 이 땅의 얼마나 뿌리깊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도 목격할 수 있었다.

거미줄처럼 엃혀있는 골목 골목을 돌다, 이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다. 서울은 그렇게 깊고, 넓으며 아련한 아지랑이처럼 그 실타래를 놓지 못하는 나는 다시 역사에 집중하게 된다.


서울은 깊다 -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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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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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번 부산 여행의 주제, 근대 건물을 들려보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한건 송정역 때문이었다. 작은 역사를 TV를 통해서 봤을 때 꼭 가봐야 할 것 같다는 이상한 욕심. 마지막 근대를 찾아간 곳은 송정역이다. 작은 민박집 사이에 아담한 역은 주차장조차 제대로 갖고 있지 못했다. 부산시에서 정한 근대 건물이라고 간단한 안내 표지가 있었고, 구경온 가족들이 사진을 찍으며 놀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허락되지 않았고, 멀리서 자취만 확인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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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송정역 :: 2008.10.09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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